미용학개론-김혜정교수님

염색의 역사

마음대로3 2005. 3. 30. 22:37
고대 ==>>고대 이집트 기록의 의하면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염색의 기원은 약 4,600여년전 이집트 고대 3왕조 때
TETA 왕의 어머니 SES 여왕이 헤나로 염색한 것이라 한다.
또한, 그들은 흰 머리를 카바하기 위해 검은 암소의 피와 거북의 등
껍질, 새의 목 부분을 기름에 익힌 것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지고,
모발에 염색을 하기 위해서는 새끼사슴의 뿔을 기름에 데운 것과
게의 담즙, 운하에서 잡은 올챙이를 말려서 기름에 넣고 빻기도 하고 고양이의 자궁과 새의 알을 함께 기름에 데운 것 등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모발 뿐만이 아니라 짙은 눈썹을 가지고 싶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편과 당나귀 간을 기름에 익혀 작은 경단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제3왕조 셰쉬여왕(Queen Schesch)을 위해 미용사가 모발 성장제를 제조하였 고, 대머리를 방지하기 위한 초기 처방으로 고양이, 뱀, 말, 악어와 야생염소에서 추출한 기름을 혼합한 것이 있었다.
이집트인 들의 두발 염색은 후에 이스라엘, 앗시리아, 그리이스,
로마, 페르시아까지 퍼져 나갔다.

==>>중동 아시아 및 앗시리아 화장품과 모발 염색제를 사용은
이집트인에 못지 않아서 남자 여자 모두 눈썹과 속눈썹을 까맣게 칠하거나 염색하였고, 눈에는 분말의 안티모니(antimony)로 아이라인(eye line)을 그려 넣었다. 여자들과 때로는 남자들까지도 백납으로 얼굴을 화장하였고, 입술과 볼을 빨갛게 칠하고, 손톱과 손바닥에는 헤너(Henna)를 사용했다.
아수르바니팔왕(King Assurbanipal)은 B.C 7세기에 살았는데 진하게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렸다고 전해진다.

==>>페르시아 남자들은 헤너(Henna)로
수염, 두발 그리고 눈썹을 물들였다. 수염은 웨이브를 주고 기름을 바르고, 때로는 가짜 수염을 덧붙여서 더 길게 보이도록 했다.

==>>그리스 남자, 여자 모두 금발머리를 선호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햇빛에 의해 모발이 탈색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에서 특별히 만든 연고로 머리를 감은 후 아무 것도 쓰고않고 햇볕에 앉아서 아름다운 금발 머리로 변하기를 기다렸다.

==>>고대 로마 지금은 고집스러워 보이고 지저분해 보여서
다 자르지만 그리이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코 위에서 만나는 눈썹
이 아름다움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눈썹을 짙게 만들기 위해 로마인들은 아티모니(Antimony), 납, 검댕으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또한 머리 염료를 만들기 위한 제조법도 소개되었고, 사용법으로 햇볕 아래에서 두피에 문지르면 칠흑같이 아름답게 될 것이라 했다. 뿐만아니라 불필요한 곳에 난 머리 털은 탈모용회반죽을 이용해 제거하기도 했다.

한편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가 고올 지방(Gaul)을 정복한 후에 로마로 금발미녀를 잡아갔다.
그 광경은 검은 머리를 가진 로마 여성들에게는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는 잡아온 고올의 금발여성의 모발을 잘라서 가발을 만들었다.
그것도 한계에 다다르자 기름과 재를 혼합하여 그들의 모발을 탈색시켰다.

얼마나 금발이 유행이 되었는지 'BLONDE WASH'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들의 염색기술은 대단히 우수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창녀들이 머리의 색을 어떤 색으로 염색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있었다.

로마의 창녀들은 머리칼을 빛나는 노란 색으로, 혹은 타오르는 붉은 색으로 염색해야 했다. 그것이 싫으면 그런색의 가발을 써도 무방했고 머리에 다는 악세사리도 제한되어 창녀는 머리를 리본으로 묶는 것도 금지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결한 처녀들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초기교회 시대의 젊은 여인들의 교육은 귀에 귀걸이를 메달지 못하게 하고, 화장과 머리와 목둘레의 진주장식을 금하고, 또한 머리색을 바꾸지 못하게 하며 둥글거나 곱슬머리로 만들지 못하게 했다.

--중세 비록 중세의 많은 여인들이 얼굴에 화장하고, 머리를 염색했지만 당연히 자연미가 대개의 남자들과 시인들에 의해 찬미되었었다. 그러나 헤어스타일은 화장기법에 있어서의 변화보다 더 빨리 변하였다. 초기 프랑크법에는 여성의 머리를 헝클어트려서 그녀의 오보(obbo-모자의 종류)가 땅에 떨어지면 많은 벌금을 물었고, 여성들의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중대사였다.

버건디 (Burgundian)의 법에 의하면, 자유인이 여자노예의 머리카락을 자르면 벌을 받게 되었고, 노예가 자유 여인의 머리카락을 자를 경우 사형에 처했었다. 앵글로 색슨 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푸른 머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당시 색의 장식에 일관성 있게 남녀 모두의 머리가 푸른색으로 칠해져 잇는 것으로 봐서, 실생활에서는 염료나 분말로 염색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아프리카에서는 남녀 모두가 수세기 동안 화장품을 사용했었다.
펠라타족(Fellatah)여인들은 헤너(Henna)잎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감싸서 물을 들였고 안티모니(Antitmony) 황화물로 눈껍풀에 화장하고, 인디고 (Indigo:인도의 염료의 뜻에서 남색, 쪽빛)로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노란색, 자주색, 푸른색으로 치아를 물들였다.

유럽의 암흑시기에 해당되는 이시기에 인더스 밸리(Indus Valley)의 문명은 굽타(Gupta) 황제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그 문화에 있어서 황금기를 맞고 있었다. 이것은 예술과 문학에 있어서의 풍부함이 꽃피우는 시대였다. 남녀 모두 화장품, 유향, 향수를 계속 사용하였다.

이 시대의 청년의 묘사를 보면 머리는 곱슬 머리 카락 들과, 흰꽃 장식을 한 원뿔모양의 모자로 장식했고, 이마는 붉은 비소로 문질렸고, 숨결은 망고, 카콜라 열매, 정향, 장뇌, 산호나무로 향기롭게
문질렀고, 팔에는 염료로 모양새를 내서 그렸고, 가슴에는 장뇌가루를 뿌렸다.

--르네상스 시대 1548년 이탈리아의 수도사이자 문인이던 휘렌주올라(Firenzuola)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관한 대화"라는 책을 통해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적인 미인에 대해상당히 정확한 묘사를 해주었다. 여기서 모발에 대한 묘사는 "모발은 꿀벌과 같이 금빛으로 반드시 가늘고 금발이며, 태양의 빛나는 빛과 번쩍임같이 물결치고,
풍부한 숱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베치아 연인들은 금발머리를 좋아했던 성향이 있어서 온종일 햇볕아래 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모발을 부식성 용액에 흠뻑 적셔서 하루의 가장 더운 시간에 3 ~ 4시간동안 밖에 나가 앉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티티안(Titian)이 유명하게 알린 베네치아 풍의 붉은 금발 색조이다.

남자는 단발을 주로 했고, 어깨까지 늘어뜨리는 긴 머리, 짧은 머리형이 공존했다. 후드나 본넷을 썼으며, 모자의 형태로 는 크라운이 둥근 돔 형태,크라운이 납작한 베레형, 챙이 없는 캡 형태, 챙이 좁고 크라운이 높은 형태등이 있었음.
모자에 는 깃털, 보석, 메달을 붙인 것이 특징.
여성은 게이블 후드를 썼는데 나라마다 특색이 있었음.

영국의 게이블 후두는 앞중심이 각이지게 철사를 가장자리에 넣었고 양 옆에는 래핏자락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머리가 많이 보이도록 뒤쪽으로 썼으며 코이프를 쓰고 그 위에 비단으로 만든 캡을 썼음. 승마할 때나 여행할 때는 깃털 달린 본넷을 착용하기도 했다

--16세기 1595년 출판된 스티븐 고슨(Stephen Gosson) 목사의 책에 그 시대 상을 표현한 것에"곤두선 머리털이 불타는 듯한 머리를 가진 이들" 여기서 '불타는 듯한 머리'들은 엘리자벳 여왕이 빨간 머리 가발에 어울리도록 물들인 것 인 듯하다.
그 당시에 모발염색제가 사용되었고, 1602년 휴 플랫(Hugh plat)은
그의 독자들에게 "삼십 분만에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밤나무 색으로
염색하는 법"을 지도했다. "황과 함께 구워서 가루로 만든납과 생석회를 같은 분량으로 물에 섞어서 약간 묽게 개시오. 이것을 머리털이나 수염에 바르고 잘 문지른 후 15분 가량 마르도록 두시오.
그리고 깨끗한 물로 여러 번 씻고 마지막으로 비누와 물로 바르고 있을수록 색이 더 짙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피부는 염색하지 않지만, 머리는 염색된 채로 상당히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그 이외의 여러 문장의 표현에 의하면 염색이 아주 일반화된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남자머리의 길이가 격심한 논쟁의 핵심이 되어 짧은 머리를 한 청교도들(Puritans)이 치렁치렁한 머리를 한 기사들(avaliers)을 향하여 수치의 손가락질을 하는 것으로 일어났다.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어떠한 남자라도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은비윤리적인 관습이며,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17세기 중반 버니의 회고록(Verny Memoirs)에서 랄프경(Sir Ralph)경이 프랑스의 블로와(Blois)에 머물면서, 영국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던 가발을 쓰고 겪었던 불편한 점들을 소개한 것에의하면 가발, 스타일, 두께에 대해 자세히 지시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싼 가격과질 좋은 헤어파우더를 구하기 힘들어 직접 제조를 지켜보는 것 등에 대한 설명도 있다.

1670~1685년 사이에는 넓고 토실토실한 얼굴이 유행했었다.
둥그스름한 붉은 입술에 큰 눈, 짙은 눈썹과 짙은 머리색 그리고 이중 턱을 한 얼굴이 인기였다. 17세기 남성들은 금발머리 여인을 선호하지 않았다. 빨간 머리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검은 색 또는 밤색머리에 어울리는 피부색을 갖춘 사람을 찾았다.
1690년대의 인기 있는 얼굴형은 더욱 길어지고 계란형으로 변했다.
머리스타일은 올리는 것이 되었다

--18세기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여자들의 헤어스타일이 머리 위에
천을 3층 내지 4층으로 쌓아올리고 두꺼운 리본을 수도 없이 길게 늘어뜨려서 1야드 높이로 쌓아 올렸다. 이것은 진짜 모발과 가짜 모발과 섞어서 만든 것으로 이들은 이 혼합된 것을 감추기 위해 굉장히 파우더를 많이 뿌렸다.

다이아몬드, 진주, 노랑, 초록, 빨간 돌들로 만들어진 것으로 모발에서 2~3인치 튀어나와 있는 큰 머리핀들이 머리를 장식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머리모양을 양털모양으로 곱슬머리가 유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파우더는 뿌려졌고 작은 테를 쓰고 모자는 거의쓰여지지 않았다. 넓은 이마가 유행이어서 여성들은 앞머리를 뽑고 이마를 넓게 만들었다. 이것은 참으로 중하게 여겨져 어머니들은 아이의 이마에 호도기름을 발라 모발이 나는 것을 방지하였다.
여성들은 생석회가 들어있는 탈모제를 집에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고, 화장품 가게에서 탈모제를 사들이기도 했다.

18세기말 비인 여성들의 화장법에는 1784년에 나온 <비인의 색>이라는 책에는 비인 여자의 풍속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여자의 치장이 참으로 극단까지 이르게 되어 인간의 발명이란 발명을 모조리 유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여자들이 머리 위에 올려놓은 군함이라든가 공원 또는 꿩 사냥터 등등의 소재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더구나 온갖 향수를 뿌려 50보 앞에서도 맡을 수 있는 사향뱀과 같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의 코를 형언할 수 없는 악취로 채워준다."

1785년 발행된 "The Toilet of Flora"의 모발 염색에 대한 설명으 "모발의 색을 바꾸려면 머리를 샘물에 가서 씻고 주석(酒石)기름에 빗을 담가서 햇볕 아래에서 빗어야 한다. 이 시술을 하루에 3번씩 하면 늦어도 8일 안에는 모발이 검정색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되었다. 이 책에는 '아마(亞麻)빛으로 머리를 염색하는 액'에 대한 제조법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모발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루는 법 즉 염색하는 법, 염색을
제거하는 법, 계속 유지시키는 법 등이 실려 있다.

--19세기 여전히 모발 염색은 행해졌고, 미국의 한 수입업자는 그의 회사에 방문한 여성들에게 붉거나 회색 모발이 여러 가지 아름답고 그리고 유연한 자연스런 색조의 갈색과 검정으로 변한 견본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여 모발이 회색으로 변한 많은 여성들이 시술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는 여성들이 모발과 눈썹을 물들이고 여러 가지 환상적인 무늬를 몸에 진기하게 채색했다. 또한 손톱은 헤나(Henna)로 붉게 염색하고 속눈썹에는 안티모니(Antimony)로 아이라인을 그려 넣었다. 터키에서도 때때로 늙은 남자는 그들의 수염을 염색했으며 늙은 여인들도 헤나(Henna)로 모발을 염색했다.

1847년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출간된 "여성미의 비평 riticusm on Female Beauty)"에 묘사된 것을 보면 여성의 모발은 반드시 길고, 유연하며 부드럽고, 숱이 풍부하여 피부와 어울리는 색이라야 한다고 규정했다.

19C 말 모발을 위한 화장품은 얼굴에 사용된 화장품보다 빨리 받아들여졌다. 1863년 파리의 모네회사의 모네사장이 파라페닐렌 디아민(Paraphenylene diamine)을 발견하여 1883년 염모제로 사용허가를 얻어 사용하게 된 것이 현대 염색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 염색제들은 현대에 사용하는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기본은 염기성이고 대략 암모니아수이다. 또 불과 알코올에 녹으며 쉽게 산화되고 제2염색제와함께 모발에 매우 자연스러운 색상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발내의 케라틴(Keratin)속에 있을 때 공기에 대한 저항력이 있다.

1888년 독일의 E. 에르트만이 티 아미노페놀 염모제를 발표하였다.
--20세기 안전한 시판용 염료는 1909년 프랑스에서개발되었는데 시대 대부분의 여성 들은 기본적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염색이라면 여배우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대 여성들이 머리염색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의식에 혁명을 가 져오게 한 것은 무엇일까. 현대의 염색혁명은 더욱 안전한 제품이나 간편해진 사용법 때문도 아니다.
다만 교묘한 선전 광고 때문이었다.

뉴욕의 카피라이터 셰릴 폴리코프가 창안해낸 [그 여자 했니? 안 했니?]라는 선전문구는 시사하는 의미가 너무 노골적이고 야하다는 숱한 비난을 불러 일으켰지만 덕분에 최고의 선전효과를 올렸다. 현대인은 비로소 2천년 전의 염색 유행을 따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옛날과 한 가지 다른 점은 남성쪽이 여성보다 많이 염색을 한다는 사실이다. 금발, 짙은 색, 백발 등의 다양한색상이 유행했다.

1931년 미국에서는 초록의 뉘앙스가 인기를 끌면서 미국 여성 75%가 염색을 하였고 특히 핑크빛 오렌지가 인기가 있었다 20세기의 모발염색은 유행과 모델, 배우들의 헤어스타일의모발 색상에 영향을 입어 점차 대중적이 되었으며 현대의 경향은 메이크업(Make Up)의 눈과 입술 그리고 피부색과 모발 색상이 함께 어울려 토탈 패션(Total Fashion)을 강조한다.

1997년 여름에는 강하고 어두었던 색상을 점차 기피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오렌지 컬러를 대부분 선호했다. 요즘은 헤어 스타일보다 헤어 칼라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로써 수년전까지만 해도 중장년층의 흰머리를 감추기위한 염색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 최근들어서는 헤어 컬러링이 패션테마로 부각되면서 젊은층의 수요가 나날이 증가되고 있다 -뷰티라이프 사랑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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